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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타개를 위한 과학기술 협력의 힘 - KIST 윤석진 원장
- 등록일 :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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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인류 사회를 강타한 지 1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막대한 피해와 혼란 속에 전염병에 대한 대응이 역사상 유례없는 신속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통상 10년 이상 걸리는 백신 개발이 1년도 채 안 되어 완료됐고, 세계 각국이 재기의 희망을 보고 있다.
백신 개발이 초단기에 가능했던 이유를 살펴보면 과학기술 협력의 중요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단적인 예로 모더나가 있다. 20년 넘게 mRNA 백신 플랫폼 기술을 축적해 온 모더나는 과학자 커뮤니티가 공개한 바이러스 유전자 지도를 활용, 단 이틀 만에 백신 설계도를 만들어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워프 스피드 작전’으로 명명된 미국 정부의 백신 개발 계획은 20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집중해 1억 회분의 접종 분량을 선구매 계약하는 조건으로 모더나에 힘을 실어주었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임상 참가자를 발 빠르게 모집하고 임상 데이터를 원격으로 수집 · 분석해냈던 것도 ‘메디데이터’라는 전문 IT기업과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외에도 감염 경로 추적, 실시간 진단 기술, 접종 경과 분석 등 팬데믹 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기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발전 중이다. 그 바탕에는 전 세계 연구자 간의 자유로운 정보 교류, 특히 분야를 뛰어넘는 융합 · 협력이 작동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이 설립한 ‘앨런 연구소’는 인공지능 기반의 데이터 마이닝 기술을 접목, 코로나19 관련 연구정보 및 데이터를 전 세계에 공개해 왔다. 각국 정부뿐 아니라, 출판사, 언론계, 연구재단 등이 이러한 데이터 공유에 동참하여 코로나19 연구에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는 누구에게나 실시간 접근이 가능할 정도이다.
거대한 도전에 따르는 협력의 복잡성
백신 접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집단면역을 통해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잠시,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중대하고 시급한 도전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기후변화로 빈번해지고 있는 기후 재난,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낡은 에너지 시스템, 지속되는 수자원 및 식량 확보 문제 등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글로벌 어젠다들이 그것이다.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 백신 개발 사례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문제일수록 다양한 각도에서 솔루션을 제안하고 검증할 수 있는 과학기술계 내의 협업 체계가 단초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지식의 공유, 조직 · 기관의 장벽을 뛰어넘는 정보의 흐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 과학기술의 한 축인 정부출연연구소의 책무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포함한 25개 출연(연)은 국가 ·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고유의 ‘역할과 책임(R&R)’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기업이나 대학이 뛰어들기 어려운 국가적 난제 해결에 집중하는 임무 지향적 연구는 출연(연)만의 확실한 차별점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임무 지향적 연구는 고차원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출연(연)의 핵심 역량은 연구분야의 수월성을 달성하는 것을 넘어서 임무 달성에 요구되는 복잡한 융합과 협력을 조직·조율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래 출연(연)에 요구되는 협력의 조건은 무엇이 될 것인가?
3차원의 과학기술 협력
첫째, 연구자 간 아이디어 생산 단계에서의 협력을 촉진해야 한다. 즉, 집단지성을 발휘하기 위해 개인 연구자들이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팀 사이언스가 필요하다. 단순한 금전적 지원은 연구자 간 예산 나눠먹기 등 형식적이고 분절적 협력에 그치기 쉽다. 이제는 실효성 있는 융합과 협력을 위한 제도 보완에 힘을 쏟을 때다. 핵심은 협력 연구가 개인의 성장에 걸림돌이 아닌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KIST는 K-Lab 사업으로 집단 단위의 수월성 그룹 성장을 지원할 예정이다. 연구자들이 자생적으로 결성한 유망 집단을 선정, 세계적 수준의 연구팀으로 성숙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목표 달성에 필요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연구팀 내에서 연구자들도 보다 안정적인 환경하에서 창의적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
둘째, 기업, 대학 등 외부 혁신 주체와의 협력 구심점으로서의 역량이 필요하다. 출연(연)은 민간 부문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주도적으로 감수하면서 동시에 민간의 강점 분야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협력망을 구축해야 한다. 아폴로 프로그램 당시 NASA는 임무 달성에 대한 절박감을 안고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추진체, 항법, 통신 등 수많은 요소 기술을 대학과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조달했는데, 복잡한 기술 공급망을 조직하여 하나의 시스템으로 엮어내는 NASA의 역량이 핵심 성공 요인이었다. 임무 달성을 위해 조직화된 협력은 자연스럽게 산업 생태계 발전과 연결된다. 항법기술을 담당한 MIT의 직접회로 기술은 훗날 실리콘밸리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흔히 국가적 임무 달성과 산업 기술 개발 등 성과 확산 활동은 별개의 것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석이조 효과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난제 해결의 최종 수혜자인 국민, 사회와의 협력 채널을 확대해야 한다. KIST만 하더라도 감염병 대응, 치안 · 안전 솔루션, 미세먼지 등 사회적 현안 해결을 위한 전담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방역당국, 경찰청, 소방청과의 협력을 통해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적 요구 사항을 해석하고 연구자와 정보를 공유, 임무의 구체적 방향을 설정한다. 치안 기술의 예를 들면 최근 개발된 접이식 방패는 현장 보관과 사용이 쉽도록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게 핵심이었다. 미세먼지 해결과 같이 더 복잡한 사회적 문제의 경우, 발생 원인의 규명, 모니터링, 저감 등 세부 분야별로 기술 수요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임무 지향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수요처인 국민과 사회가 체감할 수 있는 해결책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실험실과 현장의 간극을 줄이는 협력 체계가 절실하다.
출처: 과학과기술 2021-6월호